민족 해방과 아버님

민족해방과 아버님
曺 然 明
1914. 4. 26~1989. 4. 26
평남 평양 출생
고당 조만식 선생 장남
1931 평양숭인중학교 졸업
1934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 중퇴
1945 조선민주당 입당
1950 삼양무역산업주식회사 상무
1958 한국경제사 부사장
1981 평화통일 정책자문회의상임위원
강서군(江西郡) 반석(班石)에 피신해 계시는 아버님을 뵙고 15일 다시 평양으로 들어갈 무렵이다. 정오쯤 평양에서 30리 떨어진 태평(太平)이라는 곳을 지나는데 면사무소 앞에 사람들 한때가 웅성댔다. 사람들에게 물으니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이 연설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 틈으로 얼굴을 내밀어 자세히 들어보려는데 벌써 "해방이다." "조선독립만세"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자전거를 집어 탔다. 온몸에 땀을 뒤집어쓰며 40리 길을 단숨에 반석으로 되돌아가 "아버님, 해방이 됐대요. 일본이 항복했답니다."하며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소리부터 질렀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조용한 어조로 "그래"하시더니 라디오 연설 내용을 몇 마디 묻고는 여느 때처럼 뒷동산에 올라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저녁 때가 다 되도록 내려오시질 않았다.
나는 아무래도 평양의 상황이 궁금했다. 그 길로 평양에 나왔다. 시내가 온통 환희와 흥분으로 들끓고 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밤새도록 "만세" "만세"고함을 계속하는가 하면 잠시도 자지 않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어떤 청년들은 일본인 집을 때려 부수겠다고 몰려가기도 했다. 거리에는 일본인 상점들의 문도 이미 닫혀 있었다. 이튿날 도지사가 반석에 계시는 아버님을 모셔가기 위해 자기차를 보내왔다. 심부름을 온 김항복(金恒福) 독립문표 前 사장)씨가 "아무래도 이북에서는 고당이 주인이니 업무를 인수해 달라"는 지사의 말을 전하자. 아버님께서는 "일본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겠는가. 조만식이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았느냐"고 나무라시고는 "나는 인수를 맡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며 김씨를 그냥 돌려보냈다.
아버님은 같은 교회의 오윤선(吳胤善 고 오영진씨 부친)장로가 송효경(宋孝璟)이라는 청년편에 차를 보내 "평양에 나와 민심을 수습해달라"는 말을 듣고야 17일 오전 평양으로 올라오셨다. 아버님과 오장로, 이윤영(李允榮), 김병연(金炳淵), 박현숙(朴賢淑), 한근조(韓根祖), 한재덕(韓載德)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평남건국준비위원회(平南建國準備委員會)의 주목적이 치안의 유지에 있었으나 건준(建準)이 생기고도 당장은 평양시민들의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건준 산하의 청년들도 조선인으로서 고등계 형사나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을 끌어다 린치를 가하는 것을 간혹 본 일이 있다.
그러나 학생들과 청년들이 거리의 교통을 정리해 주는 등 치안에 협조하고 교회와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상가에서도 건준의 정상화 호소에 호응하여 얼마 안가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정작 북한주민들의 어려움은 소위 해방군(解放軍)이라는 소련 군대가 잔주하고부터 시작되었다. 8월 25일 이들이 평양역에 도착하고부터 시민들의 생활은 공포와 불안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소련 '해방군' 밤마다 약탈
소련 병사들은 들어오자마자 부녀자 겁탈과 약탈에 광분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소위 적위대(赤衛隊)라는 불량배들까지 소련 군인들에 편승하여 날뛰는 바람에 시민들의 불안과 고통은 더욱 심했다. 시민들은 밤이면 동네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소련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꽹과리를 쳐 사람들에게 알리는 등 자위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아버님은 치스차코프나 로마넹코 등 진주군 장성들에게 "당신들의 군대는 우리나라를 독립국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임시로 진주한 것인데 병사들이 이런 만행을 왜 다스리지 않느냐"고 여러번 항의했으나 그들은 시정하겠다고 말만 할 뿐 소련군의 만행은 계속 되었다.
어느 대학 출신 소련군 소령은 "진주군 사병은 죄인들로 구성돼 그런 만행을 하는 것이지 소련군이다 그런 건 아니다"며 참아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변명일 뿐 소련 정부에서도 겸이포(兼二浦)의 제련소, 진남포(鎭南浦)의 제철소, 흥남(興南)의 비료공장 등 공업설비를 마구 뜯어가고 있었으며, 북한의 식량도 수백만 섬씩 마음대로 실어가 버렸다. 건준은 약 1개월 만에 해체되고 그 해 10월 민족진영 16명과 공산진영 16명으로 평남인민 정치위원회(平南人民 政治委員會)가 생겼다. 위원장이 된 아버님은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집무하시고 1층에는 청년들로 구성된 친위대가 경호를 맡기 위해 방을 차지했다. 나는 2층 비서실에서 기거했다.
10월 어느날로 기억된다 하루는 고려호텔에 누런 군복을 입고 가죽장화를 신은 청년 5,6명이 찾아왔다 그 중의 하나가 송효경(宋孝璟) 비서실장에게 "김일성 장군이 환국하셨습니다. 조 위원장을 만나 뵈러 왔으니 안내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송 실장이 "김 장군이 지금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자기가 김일성 이라는 것이다. 김일성 하면 머리가 허연 노장군을 연상해왔던 나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머리만을 조금 기르고 뒷머리는 바짝 치켜 깍은 모습이 나처럼 30대 초반밖에 안 되 보이지 않는가. 그는 아버님 방에 들어가 한 30분 이야기한 후 돌아갔다. 내가 방에 들어가니 아버님께서는 "김일성 장군이라고 해서 적어도 내 나이쯤은 된 줄 알았는데 연령이 네 나이 또래밖에 안 되더구나. 그렇다고 당신은 가짜 같다고 할 수도 없고 난처했다."고 하셨다. 그후 그는 고려호텔에 자주 나타나 가끔 나와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도 많았다. 나는 그를 '김형'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조형'이라고 불렀다.
해외에서 돌아온 김두봉(金枓奉), 무정(武亭) 최용건(崔鏞健)도 귀국 인사 차 고려호텔에 온 적이 있다.
아버님께서 오산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 이 학교를 다녔다는 최용건은 아버님께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었다. 접견실에 아버님이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최는 얼른 내려서 무릎을 꿇고 넙죽 큰절을 했다. "선생님의 명성은 잘 들어왔습니다. 해외로 도피하시지 않고 국내에서 끝까지 무저항 불복종하신 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고 인사를 올리더니 최는 "앞으로 선생님의 수족이 되어 무엇이든지 하겠으니 하명만 해주십시오"라고도 했다.
민족진영과 기독교인 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인 그 해 11월 2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아버님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105인사건을 생각해서 발기인을 1백5명으로 하고 3.1운동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중앙위원을 33명으로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문제가 생기면서 북한의 민족진영은 결정적인 어려움을 맞았다.
소련군의 저의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인민정치위의민족진영 위원들은 반수 이상 월남해 버렸다. 아버님과 박현숙(朴賢淑), 이윤영(李允榮), 김병연(金炳淵), 한근조(韓根祖), 이종현(李宗鉉), 백남홍(白南弘)씨 등 일곱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아버님, 밀서 석 장 주시며 월남 지시
로마넹코는 신탁에 대한 찬반을 표결로 결정하라고 강요하였다. "우리말만 잘 들으면 당신을 여기의 스탈린으로 만들어 주고 김일성은 국방이나 담당케 하겠다."고 회유도 했다. 이보다 앞서 12월 중순 조민당(朝民黨) 중앙위를 열어 "신탁은 지지할 수 없다"고 설명하신 아버님은 정치위(政治委)의 위원장직을 던져 버렸다. 아버님이 사표를 내신 이듬해 1월 5일 저녁 고려호텔에는 당장 소련군과 보안서원(保安署員) 10여 명이 파견되었다. 그날부터 연금에 들어간 것이다. 이 날이 올 것을 예견하셨던지 아버님께서는 며칠 전에 나를 불러 미리 써두셨던 편지 석장을 내주시면서 서울로 탈출하라고 하셨다.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김구(金九) 주석 등 앞으로 된 친서였다. 아버님께서는 장성한 뒤론 처음으로 "목욕이나 같이 하자"고 하시고 탕 안에서 이 계획을 말씀하신 뒤 "이 일이 끝난 다음 나 때문에 다시 평양에 올 생각 말아라" "특별한 용건없이 서울 정계의 인사들을 방문하지 말라"는 엄명도 함께 내리셨다.
나는 곧바로 변장을 했다. 소련군처럼 긴 장화를 신고 일본군 털외투를 걸친 다음 안경을 꼈다. 만일의 경우 소련군에게 줄 뇌물로 군표(軍票)시계들도 준비했다. 뒷문에 준비해 둔 차에 몸을 싣고 그 날밤으로 비서실의 한 사람과 함께 평양 시내를 빠져 나왔다. 얼어붙은 대동강 빙판을 건너 밤새껏 산길을 타고 넘으나 이튿날 어느 민가에서 밥을 얻어 먹고 지명을 물으니 평양에서 겨우 20리밖에 오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대답하게 큰 길로 내려갔다. 마침 지나가는 트럭이 있어 손을 들었다. 해주(海州)에서 평양에 왔다가는 해주보안서 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득 평양에서 판치고 있는 공산당의 거두 장시우(張時雨)가 생각났다. 장의 이름을 팔았다. "장시우 동무의 명령으로 해주당(海州黨)에 내려가는 길이다."라고 하니 조수석을 얼른 비워주는 것이다. 원체 거물 이름을 대서인지 증명 보자는 말 한마디 없다.
노동당 해주시당(海州市黨)앞에 차가 멎었다. 들어가는 체하고 머뭇거리다 조민당을 찾아들었다. 위원장이 소련말 통역과 지름길 안내자까지 붙여 주어 8일에는 무사히 38선 바로 넘어 장단에 이를 수가 있었다. 서울에 와 보니 공잔 치하에 들어간 평양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자유가 너무 넘쳐 흐르는 듯 했다. 우익(右翼)은 우익대로 좌익(左翼)은 좌익대로 서울운동장과 남산에 매일같이 데모를 벌이는가 하면 별의별 정당들이 난립하여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동화(東和)백화점, 낙원동 일대 등에 댄스홀이라는게 생겨 지루박, 탱고의 가무가 유행되어가는 서울의 모습이 적도(赤都)에 아버님을 뺏기고 탈출해 온 나에겐 이방에 온 것만 같았다.
벌써 30년이 지난 일들이다.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드리며 너무도 야윈 모습에 울먹이는 나를 보고 "울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해 주시던 아버님 모습이 마지막일 줄이야. 그때는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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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jaemin3 | 2005/08/05 18:21 | 기본테마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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